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의 '미스터 안보'는 총리직 7선에 성공할까?

베냐민 네타냐후
    • 기자, 라피 버그
    • 기자, 중동 디지털 에디터
    • 기자, 루시 윌리엄슨
    • 기자, 중동 특파원
  • 게재 시간
  • 읽는 시간: 5 분

이스라엘 역사상 최장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가 오는 27일 치러지는 이스라엘 의회 선거에서 7선 도전에 나선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수십 년간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미스터 안보(Mr Security)"로 각인시켜 왔다.

올해 77세인 그는 이번 연임 도전을 앞두고,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대규모 기습이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이는 많은 이스라엘 국민들이 역사상 최악의 안보 실패로 꼽는 사건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그간 하마스와 헤즈볼라,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지휘해왔다. 동시에 본인은 부인하고 있는 부패 혐의 재판도 치러왔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네타냐후 총리의 우파 진영과 나프탈리 베네트 전 총리 및 가디 아이젠코트 전 군 참모총장이 합류한 야당 연합 간의 초박빙 승부가 예상된다.

그리고 10월 7일의 안보 참사는 이번 선거에서 표심을 가를 최대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정치적 생존자

어두운 정장에 파란색 넥타이를 맨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대형 이스라엘 국기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설명, 네타냐후 총리는 리쿠드당을 이끌고 있다

수많은 논란과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네타냐후 총리는 '정치적 생존자'라는 명성을 이어왔다.

2022년 11월 또 다시 선거에서 승리하며 6번째 임기를 시작한 그는 현재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우편향된 연립정부를 이끌고 있다.

12년 연속 집권 후 짧은 야당 시절을 거쳐 이뤄낸 그의 정권 복귀는 지지자들 앞에서 '비비(어린 시절 애칭) 왕'의 불패 신화를 입증시킨 사건이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우파 및 종교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네타냐후 정부는 종교 연구에 전념하는 초정통파 유대인에 대한 병역 면제 연장 조치도 추진 중이다.

그러나 2023년 10월 7일 발생한 기습 사건의 여파로 그의 입지는 흔들리고 있다.

당시 하마스 무장대원 수천 명이 가자지구 국경을 넘어 침투해 약 1200명을 살해하고 251명을 인질로 잡아 가자지구로 끌고 갔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 최악의 참사에 대해 일정 부분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이 사건을 안보 당국으로 책임을 돌리는 모습도 보였다. 네타냐후 총리는 사건 발생 수 시간 전 안보 관계자들이 긴장 고조를 우려해 자신을 깨우지 않았다며 고위 관계자들을 비판했다.

가자지구 하마스 관할 보건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가자 공세로 최소 7만4000명이 사망(UN도 이 수치를 신뢰한다)했으며, 이는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으로 이어졌다.

사건 전부터 그가 안보 책임자 및 주변국으로부터 사전 경고를 받았다는 보고가 이어졌으나 네타냐후 측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지난달 현지 매체 하아레츠는 UAE 정상이 사건 10일 전 네타냐후 총리에게 하마스의 대규모 작전 계획을 경고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네타냐후 총리실은 해당 보도를 "완전한 거짓"이라 일축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한편 2024년 11월 국제형사재판소(ICC)는 가자지구 내 군사 행동 과정에서 "기아를 전쟁 수단으로 사용하고 살인·박해 등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지도자에 이어 ICC 체포영장이 발부된 네 번째 국가 정상이 됐다.

영장 발부 소식에 이스라엘 정계는 격렬히 반발했으며, 두 정치인 모두 관련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형의 유산

1971년 군복을 입고 소총을 든 젊은 시절의 베냐민 네타냐후
사진 설명, 네타냐후 총리(오른쪽)는 이스라엘군 최정예 특수부대 '사예렛 마트칼' 대위 출신이다

베냐민 네타냐후는 1949년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1963년 저명한 사학자이자 시오니즘 운동가였던 아버지 벤시온이 교수로 임용되면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18세에 귀국한 그는 최정예 특수부대 사예렛 마트칼에 입대해 5년간 복무하고 대위로 전역했다. 1972년 팔레스타인 무장대원에 피랍된 벨기에 여객기 구출 작전에 투입돼 부상을 입었으며, 1973년 중동전쟁에도 참전했다.

그의 형 요나탄 네타냐후는 1976년 우간다 엔테베 인질 구출 작전을 지휘하다 전사했다. 형의 죽음은 가문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요나탄은 이스라엘의 전설적 영웅으로 기억됐다.

네타냐후는 형을 기리기 위해 대테러 연구소를 설립한 뒤 1982년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 부대사로 부임했다.

유창한 영어와 미국식 억양을 앞세워 미국 TV 방송에 자주 출연한 그는 이스라엘의 대표 대변인으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이어 1984년 주UN 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됐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

회색 정장에 붉은 넥타이를 맨 베냐민 네타냐후 당시 주UN 이스라엘 대사가 UN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 설명, 네타냐후 총리는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주UN 이스라엘 대사로 재직했다

네타냐후는 1988년 귀국 후 크네세트(의회)에서 리쿠드당 의석을 확보하고 외무차관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당 대표에 오른 그는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 직후 치러진 1996년 조기 선거를 통해 총리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는 이스라엘 역대 최연소 지도자이자 1948년 건국 이후 태어난 첫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1993년 체결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 협정을 강하게 비판해 왔으나, 1997년 헤브론 지역의 80%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이양하는 협정에 서명하고 서안지구 추가 철수에도 합의해 우파 진영의 거센 반발을 샀다. 다만 이 계획은 이스라엘 측의 실제 철수가 완료되기 전 무산됐다.

이후 예정보다 17개월 일찍 총선을 치른 네타냐후 총리는 과거 자신의 상사였던 에후드 바락 노동당 대표에게 패배하며 1999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정치적 부활

흑백 무늬 두건과 군복 스타일 재킷을 입은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수반이 회담장에서 어두운 색 정장에 넥타이를 맨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옆에 앉아 있다
사진 설명, 2002년 백악관에서 만난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왼쪽)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가 리쿠드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당 대표는 아리엘 샤론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2001년 샤론은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었고, 네타냐후는 외무장관과 재무장관을 거치며 내각에 복귀했다. 그러나 2005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철수에 반발해 장관직을 사퇴했다.

같은 해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샤론 총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 리쿠드당을 탈당하고 중도 신당 카디마를 창당한 것이다. 리쿠드당 대표로 복귀한 네타냐후는 2009년 3월 두 번째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서안지구 정착촌 건설을 10개월간 한시적으로 중단하는 데 합의하며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회담 물꼬를 텄으나, 협상은 2010년 말 최종 결렬됐다.

2009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하는 '2국가 해법'을 조건부 수용한다고 발표했으나, 이후 강경 노선으로 선회했다. 2019년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사람들이 말하는 형태의 팔레스타인 국가는 결코 건설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올해 초에도 그는 자신을 "수십 년간 팔레스타인 국가 설립을 막아선 인물"로 규정하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포함한 요르단강 서쪽 전체에 대한 완전한 안보 통제권을 "무슨 일이 있어도"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재임 기간 점령지 서안지구 내 이스라엘 정착촌은 급격히 확장됐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로 인해 2국가 해법 추진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지적한다.

현 정부 역시 2022년 집권 이후 100개 이상의 신규 정착촌을 승인하고 불법 전초기지 확대를 용인해 왔다.

정착촌 감시 단체 '피스 나우'는 정부가 "서안지구의 사실상 병합을 전례 없는 속도로 추진했다"고 비판했다.

점령지 서안지구 내 모든 정착촌과 전초기지는 국제법상 불법이다. 전초기지는 이스라엘 국내법상으로도 불법이지만 상당수 국가 지원을 받고 있다.

한편 가자지구와 그 주변에서는 팔레스타인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이어지며 2009년 네타냐후 복귀 전후로 유혈 충돌이 반복됐다.

정치 인생 전반에 걸쳐 네타냐후는 이란을 이스라엘의 최대 위협으로 꼽아왔다. 그는 30여 년간 이란 정부의 핵무기 개발 의도를 주장하며 국제사회에 강력한 대응을 촉구했다.

이 같은 공세는 2026년 2월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공습해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사살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이란이 이스라엘과 미군 기지, 걸프국가들을 상대로 보복 공격에 나서고 헤즈볼라의 개입까지 더해지면서 레바논 전선으로 전쟁이 확대됐다.

파키스탄의 중재로 4월 휴전이 성립되고 6월 미·이란 양해각서가 도출됐으나 수주 만에 무산됐다. 이후 미국과 이란의 교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직 새로운 합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귀추가 주목되는 재판

2016년부터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아온 네타냐후 총리는 2019년 11월 뇌물 수수, 사기,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자신을 정적들이 기획한 '마녀사냥'의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2020년 5월 재판에 넘어간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현직 총리 신분으로 재판을 받는 첫 사례가 됐다.

그는 이삭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했으나, 헤르초그 대통령은 유죄 인정 합의(플리바게닝)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해당 사건은 6년이 넘도록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재판이 이어지고 있다.

10월 7일 기습 사건 이전부터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킨 그의 사법부 개혁안 역시 이스라엘의 국가 정체성과 민주주의를 둘러싼 깊은 분열을 드러냈다. 이 같은 갈등은 이스라엘이 다시 선거를 치르는 현재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트럼프와의 관계

2026년 7월 28일 백악관 회담 중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함께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사진 설명, 네타냐후 총리는 2025년 1월 이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8차례 만났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이스라엘 정부의 정책 밀착이 가속화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1년 만에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은 아랍 세계의 거센 반발을 샀다. 아랍권은 1967년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점령된 동예루살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영유권을 지지해 왔으며, UN 역시 동예루살렘을 점령지 팔레스타인 영토로 규정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발표는 네타냐후 총리에게 정치·외교적 대승을 안겨줬다.

2020년 1월 네타냐후 총리는 트럼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구상을 "세기의 기회"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측이 이를 편향적이라며 거부하면서 구상은 무산됐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란 문제에서도 트럼프와 궤를 같이하며 2018년 미국의 이란 핵합의 탈퇴와 경제 제재 재개를 환영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11월 조 바이든의 당선을 축하한 네타냐후를 배신자라 비난하며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으나, 두 지도자의 관계는 다시 회복돼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동안 이란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한편, 네타냐후 총리의 부패 혐의에 대한 사면을 촉구했다. 또한 그를 여러 차례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2025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그와 총 8차례 회동했으며, 이는 전 세계 정상 중 최다 기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다시 한번 공개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자체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네타냐후 총리를 "위대한 전사 총리"라고 칭찬하며 "엄청난 반대 속에서도 강하고 용감하며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선거는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정치인에 대한 국민투표 성격을 띤다. 지지자들에게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여전히 필요한 인물이다. 반면 비판자들은 그의 정치적 생존이 이스라엘 전체를 위협에 빠뜨리고 있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