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 바로 옆에서 폭발한 원전'... 체르노빌에서의 마지막 결혼식

이리나와 세르히 부부가 꽃과 결혼 사진을 각각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출처, BBC/Jack Garland

사진 설명, 이리나와 세르히 부부의 결혼식 하루 전날 체르노빌 발전소가 폭발했다
    • 기자, 조던 던바
    • 기자, BBC 월드서비스
    • Reporting from, Chernobyl, Estonia and Germany
  • 읽는 시간: 6 분

자정이 막 지난 시각이었다. 이리나 스테첸코는 결혼식을 위해 손톱 손질을 마친 뒤, 발코니 문을 열고 밀려오는 긴장을 억누르며 잠을 청하려 애쓰고 있었다.

손님들로 가득 찬 인근의 또 다른 아파트에서는 그의 약혼자 세르히 로바노프가 주방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이리나는 그때 정적을 깨는 무언가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마치 수많은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 같았어요. 사방이 웅웅거렸고 창문 유리창이 흔들렸죠."

세르히도 "마치 어떤 파동이 지나가는 듯한 진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약한 지진이 아닐까 생각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당시 19세였던 예비 교사 이리나와 25세의 발전소 엔지니어 세르히는 소련의 신도시 프리피야트에서 펼쳐질 신혼 생활을 고대하고 있었다. 불과 5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세계 최악의 원전 사고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체르노빌 발전소의 4호 원자로 폭발 뒤 3일째 모습. 건물이 붕괴된 모습이 보인다

사진 출처, SHONE/GAMMA/Gamma-Rapho via Getty Images

사진 설명, 체르노빌 발전소의 4호 원자로 폭발 뒤 3일째 모습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오늘날 우크라이나 북부에 위치한 이 발전소에서 4호기 원자로가 폭발했다. 이로 인해 누출된 방사성 물질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40년이 흐른 지금, 방사능 수치가 매우 높은 발전소 잔해는 마침 전쟁터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당시 결혼식을 앞두었던 부부는 지금은 베를린에 살고 있다. 이번에는 원전 사고가 아닌 전쟁을 피해 삶의 터전을 또다시 옮겨야 했다.

1986년 4월 26일 아침, 세르히는 오전 6시쯤 설렘을 가득 안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기억하는 그날은 눈부시게 화창한 햇살이 쏟아져, 결혼식을 하기에 완벽한 날이었다.

그날 아침부터 그는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이리나와 함께 그날 밤 묵기로 한 친구의 아파트에 침구류를 옮겨 놓아야 했고, 꽃도 사야 했다.

1983년 체르노빌 발전소 내부의 모습. 두 명의 노동자가 기계실에서 대화하고 있다

사진 출처, Sovfoto/Universal Images Group/Shutterstock

사진 설명, 1983년 체르노빌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런데 밖으로 나가자, 방독면을 쓴 군인들과 거리를 거품 섞인 용액으로 청소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원자력 발전소 동료 중 몇몇은 "무슨 일이 터져서" 긴급 호출을 받았다고 했지만, 그들조차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친구의 고층 아파트에서 밖을 내다보던 그는 4호기 원자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소방관들과 발전소 직원들이 거대한 독성 화염을 진압하기 위해 밤새 치사량의 방사능 위험을 무릅쓰고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세르히는 "조금 불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 배운 지식을 떠올려 천 조각을 물에 적신 뒤, 방사성 먼지를 막기 위한 예방 조치로 아파트 현관문에 걸어두었다.

그리고는 곧장 시장으로 달려갔다. 토요일 아침치고는 이상하리만큼 텅 빈 시장에서 그는 부케로 쓸 튤립 다섯 송이를 골랐다.

가족과 함께 집에 있던 이리나는 밤새 전화기가 쉴 새 없이 울려댔다고 말했다. 이웃들이 전화를 걸어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전하자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서렸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었다.

당시 소련은 정보를 엄격히 통제했다. 라디오를 켰지만 사고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이리나의 어머니는 당국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어머니께 당황하거나 동요하지 말라고 했어요. 시의 모든 예정된 행사들은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아이들은 학교에 등교했다.

이리나와 세르히의 결혼식 사진 세 장이 함께 놓여 있다

사진 출처, Supplied

사진 설명, 이리나와 세르히는 결혼식 당시의 불안함, 놀람 등의 감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날 늦은 오후, 신랑과 신부, 하객들은 '문화 궁전(Palace of Culture)'을 향해 차량으로 줄지어 이동했다. 그곳은 기념행사가 열리기도 하고 인기 있는 디스코 클럽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세르히와 이리나는 이름이 수놓아진 천 위에 서서 혼인 서약을 마친 뒤, 하객들과 함께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세르히는 당시 결혼 축하연 분위기가 축제가 아니라 "슬픈"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모두가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자세한 내막은 몰랐으니까요."

두 사람은 축하연의 첫 춤으로 전통 왈츠를 연습해 왔다. 하지만 이리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예감이 커지면서 "첫 스텝부터 박자를 놓쳤다"고 했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 뿐이었습니다."

이리나와 세르히 커플이 밴드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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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음악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마침내 부부가 된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친구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그러나 세르히에 따르면, 일요일 새벽 또 다른 친구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새벽 5시에 출발하는 대피 열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야 한다고 소리쳤다.

이리나가 챙겨온 여분의 옷이라고는 축하연 둘째 날에 입으려던 얇은 드레스뿐이었다. 결국 옷을 갈아입으러 어머니의 아파트로 급히 돌아가기 위해 웨딩드레스를 다시 입어야 했다. 구두 때문에 발에는 이미 물집이 잡혔다. 이리나는 "웨딩드레스 차림에 맨발로 물웅덩이를 가로질러 달렸다"고 말했다.

열차 안에서 붕괴된 원자로의 불빛이 보였을 때도 사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세르히는 그 장면이 마치 "화산의 눈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마침내 발표된 공식 성명은 이번 대피를 "일시적인 조치"라고 설명했다.

세르히는 "3일 동안만 떠나 있는 줄 알았지만, 결국 평생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체르노빌 엔지니어 니콜라이 솔로비요프가 체르노빌 붕괴 당시를 촬용한 흑백 사진 앞에 서있다

사진 출처, BBC/Jack Garland

사진 설명, 당시 터빈실 엔지니어이던 솔로비요프는 '지붕이 무너지는 걸 목격했다'고 밝혔다

소련은 재앙의 규모를 뒤늦게 밝혔다는 이유로 거센 비판을 받았다. 폭발 사고 발생 이틀 뒤 스웨덴에서 방사능이 검출된 후에야 비로소 사고를 인정했다.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까지는 무려 2주 이상의 시간이 더 걸렸다.

안전 점검 시험의 결과는 참혹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세계보건기구(WHO)가 인용한 추정치에 따르면, 당시 폭발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보다 무려 400배나 많은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었다.

니콜라이 솔로비요프는 당시 터빈실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발밑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지붕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고, 우리 쪽으로 돌풍이 불어오면서 검은 먼지를 잔뜩 몰고 왔습니다. 그리고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죠."

그는 자신과 동료들이 발전기가 폭발했을 거라 생각하며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말했다. 원자로 자체가 폭발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니콜라이는 동료 중 한 명이 모니터를 확인하더니 방사능 수치가 "측정 범위를 넘어섰다(off the charts)"고 소리쳤던 것을 기억했다.

터빈 위에 서 있던 또 다른 동료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으나 계속 구토를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방사능 피폭 증상이었다. 니콜라이는 "그가 가장 먼저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체르노빌 폭발사고 당시 투입된 헬리콥터의 모습. 날아가는 헬리콥터에서 물질이 투하되고 있다

사진 출처, PhotoXpress/ZUMA Press/Shutterstock

사진 설명, 방사는 오염 확산을 막기 위해 헬리콥터가 동원돼 원자로 위로 모래 등 물질을 투하하기도 했다

이 사고로 인한 공식 사망자 수는 31명이다. 폭발 직후 2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후 몇 주 사이에 28명이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1명이 심정지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사고의 영향이 얼마나 광범위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정확히 파악하기도 어렵다. 사고 당시 장기적인 의학 연구 체계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5년 UN 기구들의 공동 연구는 사고 결과로 약 4000명이 사망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다른 추정치들은 실제 사망자가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노출된 원자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사능을 막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이 시작되었다.

헬리콥터가 투입되어 사고 지점에 모래와 자재들을 들이부었고, 당국은 소련 전역에서 수십만 명의 인력을 불러 모았다.

체르노빌 관련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인부들의 모습. 방독면을 쓴 인부들이 삽을 들고 체르노빌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SERGEI SUPINSKY/AFP via Getty Images)

사진 설명, 소련 당국은 방사능을 막기 위해 막대한 수의 인력을 불러모았다

극한의 방사능 수치로 인해 기계들이 잇따라 고장 나자 결국 일부 작업은 사람의 손으로 직접 처리해야만 했다.

에스토니아에서 파견된 얀 크리날과 레인 클라르는 3호기 원자로 지붕의 파편을 치우는 팀에 소속되었다.

얀은 "가슴과 등, 다리 사이에 납판을 둘렀는데 그 무게만 20kg이 넘었다"고 말했다.

"머리에는 소련제 일반 건설용 헬멧을 쓰고 고글과 장갑을 착용한 채, 주머니에는 방사선 측정 장치인 선량계를 넣고 작업했습니다."

레인은 방사능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단 1분씩 끊어서 투입되었던 당시를 떠올렸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에스토니아에 살고 있는 레인 클라르와 얀 크리날의 최근 모습

사진 출처, BBC/Jack Garland

사진 설명, 레인 클라르(왼쪽)와 얀 크리날은 3호기 원자로 지붕에서 짧은 시간씩 교대로 작업에 투입됐다

현장 수습이 한창일 때 이리나와 세르히는 키이우 동쪽 폴타바주의 할머니 집에 머물고 있었다.

도착 며칠 후, 대피자들의 방사능 수치를 점검하던 의사들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이리나가 임신 3개월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리나는 방사능 노출이 태아에게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방사능에 노출된 여성들에게 낙태를 권고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쏟았다. "아이를 낳는 것도, 낙태를 하는 것도 모두 무서웠어요."

하지만 공감 능력이 뛰어난 한 의사가 낙태하지 않아도 된다고 격려해 준 덕분에 이리나는 건강한 딸 카탸를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카탸 역시 어머니가 되었고, 세르히와 이리나에게는 15살 된 손녀가 생겼다.

이리나와 세르히가 아기 카티야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 Supplied

사진 설명, 이리나는 체르노빌 사고 며칠 후 자신이 임신 상태임을 알았고, 이듬해인 1986년 출산했다

부부는 의학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으나 당시 사고가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는다.

이리나는 무릎 관절 수술을 받으며 방사능이 뼈를 약하게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르히 또한 2016년 고향 프리피야트를 방문한 직후 겪은 심장마비의 원인 중 하나로 방사능을 꼽았다.

에스토니아 수습 대원 단체를 이끄는 얀은, 대원들이 건강 문제를 겪긴 했지만 초기 우려처럼 "암 환자가 속출하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1991년 한 해 동안 51명의 대원이 사망했으며, 그중 1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전했다.

터빈 엔지니어였던 니콜라이는 사고 당시 아내와 두 아들을 둔 가장이었다. 그는 사고 후에도 발전소로 돌아가 근무를 계속하다 최근에야 은퇴했다. 그의 막내아들은 2022년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군에 입대했으나, 2023년 9월 작전 중 실종되었다.

방치된 '문화궁전'의 현재 모습. 콘크리트와 벽돌이 드러난 사이로 벽화와 그래피티 등이 일부 그려져 있다

사진 출처, BBC/Jack Garland

사진 설명, 이리나와 세르히가 결혼한 '문화궁전'은 현재 폐허로 방치돼 있다

원자력 발전소는 사고가 난 후에도 지속적인 감시와 유지 보수가 필수적이다.

체르노빌 사고 7개월 만에 4호기를 덮는 콘크리트 석관이 완공됐으나 점차 불안정해졌고, 결국 2016년 13억 파운드가 투입된 새로운 금속 차폐막(NSC)이 그 위를 덮었다.

이제 원전 주변 '제한 구역(Exclusion Zone)' 대부분은 방사능 수치가 낮아져 잠시 방문하는 것은 안전한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거주는 여전히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파괴된 원자로 주변과 오염이 심한 "붉은 숲" 등에는 여전히 치명적인 방사능 수치를 보이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한때 젊은 세대의 낙관과 소련 기술력의 상징이었던 프리피야트의 건물들은 이제 폐허로 남았다. 세르히와 이리나가 결혼했던 문화 궁전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돔 내부에는 4호기 원자로의 굴뚝이 회색 콘크리트 껍데기에 뒤덮인 기괴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위로 자유의 여신상을 통째로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거대한 은빛 금속 돔이 비극의 흔적을 덮은 채 매끄럽게 빛나고 있다.

원자로 차폐 구조물 한가운데 작은 불길이 일고 있다

사진 출처, IAEA HANDOUT/EPA-EFE/REX/Shutterstock

사진 설명, 2025년엔 드론이 4호기 원자로 차폐 구조물에 충돌하면서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2022년 러시아군은 탱크를 앞세워 원전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직원들을 5주간 인질로 잡고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고 참호를 팠다.

지난해에는 드론이 신형 차폐막에 충돌해 구멍이 뚫리는 사건도 발생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발전소를 표적 삼아 공격했다고 비난했으나, 러시아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다행히 방사능 수치가 즉각 상승하지는 않았으나, 국제원자력기구는 이 차폐막이 "주요 안전 기능"을 상실했다고 경고했다.

세르히와 이리나는 2022년 키이우의 딸 아파트가 미사일 공격을 받은 후 독일로 이주했다. 불확실성과 비극 속에서 시작된 이들의 결혼 생활은 수많은 풍파 속에서도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서로가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 인생에 그런 시련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이리나는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마치 바늘과 실 같은 사이라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함께하니까요."

추가보도 : 폴 해리스, 엘리스 제이콥스